수안 계씨 시조, 항렬표, 조상, 본관, 파, 종파, 돌림자,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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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안 계씨 시조, 항렬표, 조상, 본관, 파, 종파, 돌림자, 족보

수안 계씨(遂安 桂氏) 한눈에 보기

성(姓): 계(桂)

본관(本貫): 수안(遂安) — 옛 황해도 수안(오늘날 황해북도 수안군 일대)

시조(始祖): 계석손(桂碩遜)

시조 계석손(桂碩遜)은 어떤 인물로 전해지나

수안 계씨의 기원 서술은 대체로 다음 흐름으로 정리됩니다.

중국 명나라 인물로, 관직으로는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냈다고 전해집니다.

1394년(명 홍무 26) 무렵, 예학(禮學)을 전수하는 임무로 조선에 파견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이후 조선에 정착하여 1407년(조선 태종 7)에 귀화했고, 수안백(遂安伯)에 봉해졌다고 전해지며,

이 “봉해진 지명(수안)”을 본관으로 삼아 수안 계씨가 성립되었다는 방식으로 설명됩니다.

‘수안(遂安)’이 본관이 된 이유

수안 계씨의 본관 설명은 보통 이렇게 요약됩니다.

시조가 조선에 정착한 뒤 수안백(遂安伯)으로 봉해졌고

후손들이 그 봉군지(봉해진 지역/호칭과 연결된 지명)를 관향(본관)으로 삼아 계통을 정리했다

초기 세계(世系)에서 자주 언급되는 핵심 구도

1) 시조의 가계(중국 쪽 배경으로 전하는 내용)

시조 계석손은 계경횡(桂炅橫)의 아들이라고 전하며, 계경횡은 성양태수(城陽太守)를 지냈다고 설명하는 자료들이 많습니다.

2) 시조의 아들 4형제(초기 분기 축)

시조의 아들로 4형제가 언급되며, 이름은 보통 아래처럼 정리됩니다.

계원우(桂元祐)

계원조(桂元祚)

계원제/계원시(桂元禔) ← 자료에 따라 한글 표기가 갈리는 경우가 있습니다(원제/원시).

계원겹(桂元袷)

3) 관직·궁중 출납 관련 인물(초기 기록으로 자주 등장)

맏아들 계원우가 합문지후(閤門祗候)를 지냈다고 전해지고,

그의 아들 계문식(桂文植)이 우대언(右代言)을 역임하며 왕명 출납(궁중 문서·명령 전달)을 맡았다는 설명이 따라붙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거(世居)와 확산: “관서(關西) 명문”으로 불린 배경

수안 계씨는 전승·정리문에서 평안북도 중심의 세거 흐름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특히 평안북도 선천(宣川), 강계(江界) 일대가 대표적 거점으로 언급됩니다.

한편 20세 전후로는 경기 양주 등 남쪽으로 옮겨 정착한 가지도 언급됩니다.

일제강점기 무렵 조사 자료를 인용하는 정리에서는, 당시 계씨 인구의 대부분이 북쪽 지역에 분포했다는 식의 설명이 함께 실리기도 합니다.

집성촌으로 자주 언급되는 지역

정리문에서 자주 반복되는 집성촌(또는 주요 세거지) 표기는 아래와 같습니다.

평안북도 선천

평안북도 강계

(본관지) 황해도 수안 일대

본관이 여러 개로 보이는 이유(정리 방식)

고서나 일부 자료에서 계씨 본관이 여러 갈래로 소개되기도 하지만, 현대의 많은 정리에서는 다음처럼 설명합니다.

여러 본관으로 보이는 것들 가운데 상당수는 분관(새 본관)이라기보다 후대 세거지(살던 지역) 이름이 본관처럼 기록된 경우로 보고,

실제로는 수안 계씨를 중심으로 합쳐 정리하는 흐름이 강하다는 식입니다.

수안 계씨에서 자주 거론되는 인물(근현대 포함)

자료에서 ‘수안 계씨 인물’로 자주 함께 언급되는 이름들(대표 예시):

계봉우(桂奉瑀): 독립운동가로 널리 알려짐

계연수(桂延壽): 근대의 인물로 자주 언급됨

계용묵(桂鎔默): 소설가

계응상(桂應祥): 농학자(북한 쪽 활동 경력으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음)

계덕해(桂德海): 문집이 언급되는 인물로 소개됨

※ 인물의 본관·세계 편입 여부는 “족보 등재/미등재” 같은 문제로 별도 논쟁이 붙는 경우도 있어, 문중 내부 정리와 대외 소개문이 100% 일치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인구(2015년 기준으로 널리 인용되는 수치)

계(桂) 성씨 전체: 6,636명

수안 계씨: 6,056명

(집계·정리 방식에 따라 ‘계씨 전체 수’와 ‘수안 계씨 수’가 함께 제시되는 형태가 흔합니다.)